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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헤드헌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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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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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였던 조선 중기 문인 강백년(1603~1681년)은 1628년(인조 6년) 1월에 '조봉대부(종4품 문관 품계)로 승품한다'는 교지(국왕이 내리는 임명장)를 받는다.

그가 문과에 급제한 것이 불과 6개월 전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초고속 승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교지 뒷면을 자세히 보면 '이리(吏吏) 심기(沈麒)'라는 글자가 작게 적혀 있다.

'이리'는 이조정색서리를 줄인 말로 이조 최말단에서 인사업무를 보는 아전을 말한다. '심기'는 그의 이름이다. 최고 권위의 문서인 교지에 아전 이름이 낙서처럼 쓰여 있는 것은 왜일까.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는 '장서각' 최근호에 '조선후기 지방 명문 출신 관리와 경아전의 관계망'이라는 논문을 실었다.

그간 교지 뒷면 글자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논문은 주요 가문 편지 등 고문서를 교지와 대조해 이들 글자가 경아전(중앙서리) 이름이며 교지 주인공과 서리들이 인사 문제를 놓고 공생 관계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조선 중기 이후 지방 양반들이 중앙에서 벼슬을 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장동김씨, 풍양조씨 등 서울 기반 노론계 양반들이 중앙관료조직을 장악하고 있어서였다. 그렇다면 지방 사대부는 어떻게 벼슬을 얻고 승진을 했을까.
전경목 교수는 그들이 탈출구로 삼은 것이 바로 이조나 병조 서리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지방 출신들은 중앙 인사 동향 등 정보에 어두워 서리들과 어떻게 해서든 교분을 맺으려 했고 정해진 급료가 없었던 서리들은 이들에게서 수수료를 챙기면서 서로 살길을 모색했다.

서리는 인사와 관련된 각종 자문, 본인과 가족 등 벼슬자리 청탁을 받았으며 임명장을 작성해 주면서 뒷면에 자기 이름을 기록해 존재감을 표시했다.


서리들은 소속 기관별로 '이리' '병정리' 등으로 불렸다. 친밀도가 남달랐을땐 '단골(丹骨)' '단골리'라는 사적 호칭도 애용됐다. 1893년(고종 30년)에 발부된 황우영 통훈대부(정3품 품계) 임명 교지에는 '단골 김중섭'이라고 표현돼 있다. 능력 없는 서리는 즉각 교체됐다.

경상도 봉화 사람으로 조선 중기 문신 권벌 후손인 권택하(1799~?)는 1846년(헌종 12년) 정릉참봉(능을 관리하는 9품 말직 관직)에 제수됐다. 이때 교지를 이경민이라는 서리가 작성했다. 하지만 1851년(철종 2년) 조봉대부로 임명되면서 받은 그의 교지에는 이름이 오상린으로 바뀌어 있다.

오상린은 재주가 뛰어났던지 송영로(1803~1881년) 김완식(1771~?) 신기영(1805~?)도 고객으로 뒀다. 심지어 전라도 흥덕현 출신으로 목천현감을 지낸 황윤석(1729~1791년) 일기를 보면 서리는 녹봉까지 대신 수령해 관리한다. 관계는 대를 이어 지속되기도 했다. 권택하 아들 권호연(1824~?)은 부친 단골리였던 오상린과 편지로 정보를 주고받았으면서 바라던 승정원 주서(국왕 비서실 정7품 관직) 자리를 얻어냈다. 고산 윤선도 후손인 해남윤씨 집안도 서리들과 오랜 기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관원이 된 양반은 도움을 받는 대가로 당삼채(堂參債) 등 잡세를 거둬 서리들에게 지급하거나 개별 재산으로 사례했다.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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